지난 21일 오후 서울 금천구 시흥동 전진상의원에서 지난 35년간 의료봉사를 해온 건국대 신경외과 고영초(58) 교수가 진료하고 있다. 그는“봉사할 기회를 준 분들에게 내가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유마디 기자 umadi@chosun.com
건대병원 고영초 교수, 서울 시흥 ‘전진상의원’서 35년째 봉사
봉사가 아니라는 슈바이처 – 소아 뇌종양 최고 권위자, 인턴부터 돌본 어려운 환자… 마늘·군밤·종이학까지 선물 “생명 살리는 법 나눠야죠”
“35년이나 됐나요? 제가 이곳에서 봉사를 한 시간이 아닙니다. 이분들이 제게 봉사할 시간을 이렇게나 많이 주신 거죠.”
지난 21일 오후 7시 서울 금천구 시흥동 전진상(全眞常)의원 진료실에 50대 의사가 들어서자 대기실에 있던 환자들 얼굴이 밝아졌다. 하나둘 일어나 “선생님 오셨어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이들은 건국대병원 신경외과 고영초(58) 교수를 찾아온 ‘단골’ 환자다. 고 교수는 1977년 의과대학 인턴 시절부터 이곳에서 의료봉사를 해왔다. 올해로 35년째다.
전진상의원은 빈민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위해 1975년 국제가톨릭형제회(A.F.I)의 후원을 받아 고(故) 김수환 추기경 요청으로 설립됐다. 처음엔 독일과 벨기에의 원조를 받아 의사, 약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1명씩 4명으로 초라하게 시작했다. 온전한(全) 자아 봉헌, 참다운(眞) 사랑, 끊임없는(常) 기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은 의사 2명과 간호사 8명이 상주한다.
좀 더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은 오후 7시쯤 각 병원에서 퇴근한 현직 의사들의 도움을 받는다.
배현정(65) 전진상의원 원장은 “소아 뇌종양 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 고 교수님이 이 먼 곳까지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2주에 한 번 수요일 퇴근길에 의원에 들른다.
매번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 5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일반 병원은 5년마다 한 번 진료 기록을 정리하지만 전진상의원은 모든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 기록엔 환자의 가정환경, 경제 능력 등도 표시해둔다. 고 교수가 그동안 진료한 환자 3000여명의 기록이 탑처럼 쌓여 있다.
네 살 때 뇌종양으로 시각 장애 2급이 된 이모(37)씨는 고 교수를 찾아와 31년째 진료를 받고 있다. 고 교수에게서 뇌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그는 “선생님 덕분에 잠시나마 앞을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환자들은 손수 재배한 마늘 한 움큼, 군밤 한 주먹 등을 선물하기도 한다. 언젠가 종이학 1000마리를 선물한 적도 있다.
신부(神父)가 꿈이었던 그는 가톨릭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성직자의 길을 준비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진로를 바꿔 서울대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의료봉사는 신부 대신 의사를 택한 그의 신앙생활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전진상의원엔 환자가 하루 평균 70여명 다녀가지만 고 교수가 오는 날엔 100명으로 늘어난다.
고 교수는 본인이 진료할 수 없는 분야의 환자가 있으면 건국대병원 후배들을 데려오기도 한다. 그는 주말에는 외국인 노동자를 진료하는 ‘라파엘클리닉’,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진료하는 ‘요셉의원’ 등 세 병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10시간은 봉사로 보낸다. “가진 것이 있으면 나눠야죠. 귀한 생명을 살리는 방법을 배웠으니 그 뜻을 다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