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클리닉 김유영 대표이사. © News1 허경 기자
(서울=뉴스1) 고유선 기자=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는 그곳에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진료소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김수환 추기경님의 사랑과 보살핌 덕분이었습니다”
1997년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모인 가톨릭대 신학대학의 한 건물로 남루한 행색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노동에 찌들고 삶에 지친 그들을 맞이한 이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무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라파엘 클리닉의 봉사자들이었다.
그곳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혜화동 성당의 진료소를 비워줘야 하는 라파엘 클리닉의 처지를 들은 김수환 추기경의 부탁으로 학교측은 몇 십 년 동안 닫아두었던 문의 걸쇠를 풀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서 가족 하나만을 바라보고 일하는 이들을 위한 무료진료소 라파엘 클리닉의 총 책임자는 김유영 대표이사(67)다.
김 대표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1969년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서울대병원에서 의사로 재직했다. 현재는 국립중앙의료원 알레르기내과장과 한국천식알레르기협회장을 겸임하고 있다.
그는 “라파엘 클리닉은 1997년 4월 첫 진료를 시작한 이래로 400여명의 봉사자들이 돌아가며 매년 1만2000명의 이주노동자들을 무료로 진료한다”라며 “간이진료실을 꾸려 운영하기 때문에 분만이나 수술 등이 필요할 때는 2차병원으로 진료를 의뢰해주고 이 경우 발생하는 진료비는 환자의 상태나 경제적 상황 등을 고려해 최하 50%에서 최대 전액까지 의료비를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라파엘 클리닉의 진료는 매주 일요일을 ‘큰 진료날’, ‘작은 진료날’로 명명해 이 둘을 번갈아 가며 운영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격주마다 큰 진료날이 돌아오는 셈이다.
큰 진료날에는 19개 진료과목 전체가 운영된다. 작은 진료날에는 10개 정도의 과목이 개설된다. 약국과 의무기록실은 매주 운영 중이다.
어려운 이웃들 가운데 굳이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진료소를 운영하는 이유에 대해 김 대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힘들게 살지만 우리는 ‘가족’이라는 최소한의 비빌 언덕이 있지 않느냐”며 “외국인의 경우에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아는 사람도 없는데다 아프기까지 하면 더 서럽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인들의 경우에는 건강보험이 안되기 때문에 보험수가가 아닌 일반수가로 치료비를 계산해야 하는데 일반수가는 보험수가보다 환자 부담금이 10배 이상 많아 이주노동자들은 병원비가 무서워 아파도 참는 경우가 대다수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난 7월 동대문구의 한 고시원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40대 필리핀 노동자가 그런 경우였다. 그는 고혈압을 앓고 있었지만 한 달에 100여만원 돈을 필리핀 가족들에게 보내고 나면 남는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수 없었다. 결국 그는 2평 남짓한 고시원 방에서 병을 키우다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주노동자들의 안식처로 자리 잡은 라파엘 클리닉은 2005년 서울시 산하 사회복지단체로 인정을 받았다. 2007년에는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몽골 의료진을 국내로 초청해 서울대병원에서 연수비용을 대주고 의료교육을 시켜주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동진료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며 서울을 찾을 수 없는 이주노동자들과 다문화가정의 아픈 이들을 치료해주는 것도 라파엘 클리닉의 역할 중 하나다.
김 대표는 “봉사자들도 본업이 있는 사람들이고 주말에는 쉬고 싶기도 하겠지만 다들 한 번 봉사를 나오기 시작하면 쉽게 그만두지 않는다”며 “그 배경은 상투적이긴 하지만 역시 ‘보람’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어눌한 한국말로 ‘고맙다’는 감사인사를 하고 아침 일찍부터 집에서 빵을 구워와 봉사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이주노동자들을 보며 우리 봉사자들은 정서적으로 충분히 보상을 받고 있다는 생각들을 한다”고 전했다.
많은 활동을 펼치는 봉사단체라 후원금이 넉넉한가 하면 그건 아니다.
김 대표는 “15년 동안 이사를 세 번이나 했고 지금도 건물을 비워줘야 할 처지다”라며 “어렵게 들어간 신학대학의 부속건물은 진료소를 꾸린 지 1년 만에 건물이 헐려서 나왔고, 지금은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청소년회관 복도를 ‘무단 점거’하며 진료를 이어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전액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라파엘 클리닉의 후원규모는 연 7억원 정도다. 400여명의 봉사자들과 뜻있는 독지가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후원금을 마련하지만, 이 정도로는 환자들에게 따뜻한 진료환경을 제공해줄 수도 없을뿐더러 환자들의 수술비 역시 마음껏 대줄 수 없다.
김 대표는 “상설진료소가 없는 건 단순한 불편 이상으로 문제점이 많다”라며 “오후 2시부터 시작하는 무료진료를 받기 위해 환자분들은 아침부터 줄을 서는데 추운 겨울 야외나 다름없는 학교 건물의 복도에서 몇 시간동안 줄을 서면 병이 없던 사람도 병이 들지 않겠느냐”고 걱정했다.
진료소 곳곳에 설치된 석유·전기난로에만 의지한 채 진료를 기다리다 보면 환자들이 감기에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말에만 진료를 하는 라파엘 클리닉의 특성상 주중에 관리 인력이 부족한 것도 아쉽다.
1억원에서 2억 원 정도하는 이동진료소 차량도 어느 후원자에게서 빌려 쓰고 있다.
이런 라파엘 클리닉을 돕기 위해 이문세, 노영심, 하림 등의 뮤지션들은 작년부터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
노영심씨는 작년과 올해 후원음악회를 열었다. 환자들도 후원자들도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사진이나 그림을 기부하는 후원자도 있다.
2009년 2월 우리 곁을 떠난 고 김수환 추기경도 유언으로 전 재산을 라파엘 클리닉에 남겼다.
마지막으로 김 대표는 이름 모를 어느 봉사자의 이야기를 전하며 “어렵지만 봉사의 정신이 끊임없이 샘솟는 라파엘 클리닉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일주일에 한 번 동성고등학교를 찾아 진료를 받으러 온 이주노동자들에게 라면을 끓여주던 모자(母子)가 있었습니다. 그 모자는 ‘줄을 서야 진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이곳을 찾은 이주노동자들에게 따뜻한 한 끼를 선물하고 싶다’며 매주 자비로 라면을 사와 노동자들의 허한 속을 달래줬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이름을 물어도 그들은 손사래를 치며 신분을 밝히지 않았죠. 그 모습을 본 분당의 한 교회분들이 라면과 빵을 가져와 나눠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뒤로부터 그 모자의 모습은 볼 수 없었습니다. 사랑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하신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