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노동자 무료 진료 동숭동 ‘라파엘 클리닉’ 새 건물로 이사]

1997년 故김수환 추기경이 서울 의대 교수들에 부탁해 개설
김 추기경 전 재산 340만원도 후원 계좌에 보태… 오는 6월 5층 건물로 이전

‘라파엘’은 성경 속 치유의 천사지만,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현실에서 라파엘을 만났다. 1997년 외국인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에 눈을 뜬 서울대 의대 교수들이 뜻을 모아 문을 연 무료 진료소 이름이 ‘라파엘 클리닉’이었다. 지난해까지 이곳을 다녀간 외국인 노동자는 파키스탄·필리핀·방글라데시 등 78개국 출신 18만4423명. 그 인술(仁術)은 가히 종합병원급이었다. 하지만 병동은 초라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성당 한편, 신학교 교정, 고등학교 강당 복도를 전전하는 신세였던 것이다. 그 라파엘 클리닉이 17년 만에 내 집을 갖게 됐다.

오는 4월 14일 외과·치과부터 문을 여는 라파엘의 새 둥지는 서울 성북구 성북동 1가 8번지. 지하 1층, 지상 5층 연면적 1177㎡(약 356평) 규모다. 지금까지 매주 일요일마다 진료실 역할을 해왔던 서울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강당의 ‘복도 병동’은 오는 6월이면 문을 닫는다.

라파엘 클리닉의 산파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1996년 서울대 의대 가톨릭 교수회 멤버들에게 “외국인 노동자의 삶이 비참하다. 그들을 위한 의료 활동을 해 달라”고 당부한 이가 김 추기경이었다. 1997년 4월 첫 진료 장소는 혜화동 성당 한편이었다.

라파엘 창립 멤버로 지금까지 무료 진료를 하고 있는 서울대 안규리 교수는 진료 첫날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교수와 학생들이 리어카에 간이 의자 몇 개와 약이 든 상자 몇 박스를 싣고 와 성당에 부렸지요. 외국인 근로자들이 머뭇거리며 다가와 물었어요. ‘무료로 치료를 해 준다길래 왔는데….’ 저와 동료 교수들이 ‘걱정하지 말고 앉아서 어디가 아픈지 얘기해 보세요’라고 했지요.” 외국인 근로자들은 묻고 또 물었다. “진짜 공짠가요? 가진 돈이 없어서….”

빈국(貧國)의 야전병원처럼 시작한 진료소에 라파엘이라는 이름을 달아준 이는 천주교 강우일 주교였다. 그해 말 IMF가 찾아왔다. 직장을 잃은 외국인 노동자들은 굶은 채 진료소를 찾았고, 간식으로 놔뒀던 초코파이들이 눈 깜빡할 사이 사라졌다. 그 추웠던 겨울을 지나 1998년 여름부터 동성고 강당 복도를 빌려 지금까지 매주 일요일 진료를 이어왔다.

라파엘 클리닉은 ‘무료 종합병원’이었다. 외양은 궁색했지만, 내과·외과·산부인과·안과 등 없는 과가 없었다. 진료과가 20개나 됐다. 서울 한복판에 있어 오가기 좋았고 진짜 종합병원의 ‘3분 진료’와 달리 서울대·고려대·건국대 소속의 의료진이 차근차근 아픈 곳을 물어봐주는 ’10분 진료’도 이곳만의 미덕이었다. 하루 서른명에 불과했던 환자 수는 하루 300여명, 한해 1만6000여명으로 늘어났다.

강당 긴 복도는 진료실이자 병실이자, 진료 대기실이었다. 의사들의 책상과 간이침대가 빼곡히 늘어선 그곳에서 환자들은 어깨를 부딪쳐가며 진료·치료를 받아야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 복도병원 라파엘의 처지를 늘 안타까워했다. 2009년 2월 23일 김 추기경이 선종한 뒤 라파엘 클리닉 후원 계좌엔 340만원이 입금됐다. 김 추기경이 남긴 전 재산이었다. 추기경이 하늘에선 보내는 응원 덕분이었을까. 2012년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큰 결심을 했다. 서울 성북동에 5층짜리 건물을 임대해 라파엘 클리닉을 이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벽돌 제조 전문업체, 창틀 제조업체, 건축사무소가 무료 또는 실비로 작업을 맡았고, 옛 환자들도 십시일반 힘을 보탰다. 척추협착증과 위궤양, 백내장 때문에 매주 일요일 혜화동을 찾았던 중국인 남모(여·65)씨. 한국에서 가사도우미였던 그녀는 지난해 7월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 진료소를 찾았다. “몸을 고쳐준 것도 고맙지만, 마음을 고쳐줘서 더 고맙습니다”라며 흰 봉투를 내밀었다. 5만원짜리 지폐가 한 장 들어 있었다.

라파엘 클리닉을 이끌고 있는 김전 전(前)서울대 생리학과 교수는 “새 진료소 건물 외벽 창문은 빨강, 초록, 검정, 노랑, 파랑 페인트로 칠했다”고 말했다. 올림픽 오륜 마크 색을 따라 한 것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돌본다는 뜻이다. 1층엔 김수환 추기경을 기념하는 ‘메모리얼 월’이 세워진다. 그가 남긴 말들이 새겨질 예정이다.

2014.03.26 03:08 | 최연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