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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길] 이주노동자 무료 진료소 ‘라파엘 클리닉’ 2008 11/25 위클리경향 801호 치유의 천사, 천사의 치유

고통받는 이의 모습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보게 하시며 그들이 내민 손을 보듬으며 당신의 미소를 보게 하소서 베품보다는 늘 섬기는 법을 배우게 하시어 자신을 낮추고 진정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 박성규 ‘라파엘의 기도’ 중에서

일요일. 이주노동자 무료 진료소 라파엘 클리닉(대표 김유영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 교수, www.raphael.or.kr)의 ‘작은 진료’가 있는 날이다. 매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7시까지 열리는 라파엘 클리닉은 한 주씩 번갈아가며, 내과·가정의학과를 중심으로 진료하는 ‘작은 진료’와 전체 17개 과목을 한꺼번에 진료하는 ‘큰 진료’로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 진료소로 사용하고 있는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강당 복도는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오전부터 대학로에서 민주노총 집회가 열려 일대에 경찰들이 쫙 깔리는 바람에 내진환자 수가 눈에 띄게 준 것 같은데도 이 모양이다. 복도에는 피부색도, 차림새도 구구각각인 외국인 환자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그 사이를 의사와 자원봉사자 들이 비집고 다니며 업무를 본다. 응급 환자만 찾아보기 어렵다뿐이지 마치 야전병원을 방불케 하는 ‘복도병원’. 일요일마다 한 고등학교 강당에서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라파엘’은 <성서>에 나오는 ‘치유의 천사’다. 11년 전, 처음 진료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 이름조차 없었다. 그 전신은 1958년 시작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가톨릭학생회(CaSA)의 무료 진료소였다. 50년 전만 해도 국내 의료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의료보험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학생 중심의 빈민 진료는 무의미해지기 시작했다. 1996년 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가톨릭학생회 교수와 학생들은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참담한 의료 실태를 전해 들었다. 1993년부터 산업연수제도를 통해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큰 꿈을 안고 이 땅에 들어왔다. 1996년 당시 약 22만 명의 이주노동자가 다양한 산업 현장에 종사했지만, 대부분 불법체류자로 혹사와 임금체불 등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런 처지에 의료 혜택이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 가톨릭학생회 교수와 학생 들은 과거의 전통을 되살리기로 했다. 창고 안에서 낡은 궤짝 두 개를 찾아 끄집어냈다. 과거 빈민진료 때 사용했던 진료상자였다. 어쩌면 유물로서나 남아 있어야 했던 그 상자가 이렇게 다시 쓰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학생들은 상자 안에 시효가 지난 약제와 약봉지, 처방전으로 쓰일 종이와 간단한 진료 도구들을 넣어 리어카에 싣고 혜화동 성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낡은 궤짝 안에 들어간 라파엘 천사는 리어카에 실려 소리 없이 이주노동자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1997년 4월 13일 혜화동 성당 백동관에서 문을 연 무료 진료소는 토요일에도 일을 해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용하기 쉽도록 격주 일요일마다 오후 2시에 진료를 시작했다. 초기 30명을 밑돌던 환자 수는 어느새 급증해 한 달 만에 혜화동 성당 안의 진료 장소가 비좁아졌다. 이를 전해 들은 김수환 추기경과 강우일 주교는 그때까지 봉쇄 구역이나 다름없던 가톨릭대학교 성신 교정의 문을 열어주었다. 학생들은 다시 진료날이면 리어카에 의료도구와 약을 싣고 대학로를 가로질러 성신 교정에 진료소를 차렸다. 처음에 축구장처럼 넓어보이던 성신 교정 내 3층 건물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가 꽉꽉 들어찼다.

라파엘 클리닉은 매주 일요일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강당 복도에서 열린다. 이역만리에 온 이주노동자를 위한 병원이다. 의사가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가톨릭 교수회 교수들과 그동안 흩어져 있던 가톨릭학생회 동문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진료소의 빈 자리들을 채워주었다. 진료소가 성장하면서 진행과 통역, 청소 등의 자원봉사의 물결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해 10월 강우일 주교는 무료 진료소에 치유의 천사 ‘라파엘’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한겨울의 한파가 닥쳐왔다. 1997년 겨울, IMF 외환위기로 많은 이주노동자가 직장을 잃었다. 유달리 추웠던 어느 날, 환자들의 아침 대용식인 초코파이가 동이 났다. 오후 2시까지 진료소에 도착하기 위해 아침을 거른 채 먼 길을 오는 경우가 다반사인 환자들을 위해 준비한 대용식이었다. 처음엔 환자들이 미안해하며 조심스레 집어가던 초코파이가 30분 만에 모두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라파엘 사람들은 깨달았다. 지금 환자들에겐 약보다 먹을 것이 더 시급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들은 ‘적극적인 구호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마침 라파엘이 ‘제2회 지학순 주교 기념 정의평화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으로 쌀을 비롯한 구호 식량을 구입할 수 있었다. 사정을 알게 된 여러 단체의 격려와 후원도 잇따랐다. 그해 겨울 라파엘 산부인과와 소아과는 유례없이 바빴다. 라파엘 사람들은 당시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쭈뼛쭈뼛 진료소 문을 들어서던 이주노동자들의 서글픈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심지어 막 태어난 아이를 몰래 내버리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학생들이 아이를 맡겠노라고 나서는 일까지 벌어졌다.

자체 인력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때 다행히 강남성모병원 산부인과팀이 합류해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때 태어난 아이들이 어느덧 열 살 소년으로 자라나 있을 터인데…. 모두 어떻게 그 엄혹한 시기를 견뎠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시련을 통해 라파엘 사람들의 봉사가 오히려 깊고 넓어진 것만큼은 분명했다. 라파엘 클리닉 김전(서울대 의대 생리학 교수) 소장의 말마따나 “모든 것이 다 움츠러드는 IMF 동안에 라파엘 클리닉은 가장 성장한 ‘사업’을 벌인 것”인지도 모른다. ‘선의’는 바이러스다. 진료 과목도 늘고, 후원금도 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주노동자의 삶은 춥고 아프다. 1

998년 6월, 라파엘 클리닉은 현재의 동성고등학교 4층 강당 복도로 이사했다. 가톨릭대학교 측이 신학부 성신관을 재건축하면서 건물을 비워줘야 했기 때문이다. 라파엘 클리닉이 성신 교정으로 옮겨갈 때만 해도 이삿짐이라곤 리어카 2대 분의 간단한 물품이었지만, 동성고등학교로 이사할 때는 이삿짐이 무려 큰 트럭으로 3대 분에 이르렀다. 그리고 또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숱한 기적이 일어났다. 약품과 도구가 비면 어느새 채워지고 모자라면 보충되는가 하면, 급한 환자의 대수술 후면 어김없이 수술비만큼의 후원금이 어디선가 지원되곤 했다. 하다못해 생각지도 않은 상을 받으면서 생긴 상금이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다. ‘천사(월 1004원)’와 ‘대천사(월 1만1004원)’ 후원을 비롯한 후원금도 꾸준히 늘어났다.

1998년 가톨릭대학교 산부인과 박종섭 교수팀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김중수 교수팀 등이 합류하면서 라파엘 클리닉은 무려 17개 과를 갖춘 준 종합병원으로 성장했다. 동두천과 의정부에도 진료소를 열었다.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의과대학 가톨릭학생회 멤버들이 속속 봉사의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제 라파엘 클리닉은 겉보기엔 허름한 ‘복도병원’일지 모르지만 그 진료 수준만큼은 어디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으로 넘쳐난다. 다만 지금의 동성고등학교 강당 복도에서 벗어나 그나마 의료 환경이 갖춰진 곳으로 옮기는 게 소망이라면 소망이다. 장기간 사용으로 인한 학교 측의 불편도 불편이지만, 먼지나 난방 문제 등 열악한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증하는 환자들을 위해 무엇보다 시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까운 보건소를 빌려 휴무일에 진료하는 방안을 알아보고 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오후 7시. 라파엘 식구 몇 사람이 조금 일찍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은 학교 밖에 별도로 운영하고 있는 치과 병원 및 ‘라파엘 인터내셔널’ 사무실에서 라파엘 몽골 의료봉사단 해단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2007년 5월 13일, 라파엘 클리닉은 10주년 기념행사를 하면서 globalization, reproduction, agape, community, environment for patients의 첫 글자를 딴 이른바 ‘GRACE(은혜)’ 비전을 선포했다. 그 일환으로 라파엘 인터내셔널을 설립하고, 가난한 세계 이웃들에게까지 의료봉사의 손길을 뻗치기로 했다. 그 첫걸음으로 인도 오리사로 향했지만 신변의 위험이 있어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택한 곳이 몽골이었고, 2007년 10월 1기에 이어 2008년 5월 2기 봉사단이 몽골을 다녀왔다. 그 사이 내버려두면 죽을 수밖에 없던 심장기형 아기 샤옥도돔을 서울로 데려와 수술을 시켜주기도 했다. 학교 문 밖을 나서는데 성당에선 저녁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고 거리엔 낙엽들이 뒹굴고 있었다. 집회를 마친 민주노총 노동자들은 깃발을 앞세우고 어디론가 흩어져갔다. 대치하고 있던 전경들 역시 부산하게 장비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2008년 늦가을, 거리는 미구에 닥쳐들 IMF 때보다 더 엄혹한 겨울에 대한 예감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그 한파로 내몰릴 때 먼 나라에서 온 이방 사람들의 삶이야 말한들 무엇하랴. 그래서 어둠이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는 라파엘은 아프다.

<글·사진 유성문 편집위원 rotack@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