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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고국에 돌아가도 여기 안 잊을 거예요” | 글 박영주

한기가 매섭게 파고드는 2012년 1월 1일 새해 첫날. 일요일인데도 교문이 활짝 열린 학교가 있다. 서울 혜화동에 있는 동성고등학교. 이 학교 강당 건물 4층은 매주 일요일 오후 2시가 되면 특별한 곳으로 둔갑한다. 온 건물이 냉기를 뿜어대는 썰렁한 강당복도가 활기차고 따뜻하게 변하는 곳.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무료진료소 라파엘클리닉.

라파엘클리닉은 1958년, 6・25 전쟁의 상처로 신음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진료한 것이 시작이다. 천주교 인권위원회로부터 외국인 노동자의 참담한 의료실태 소식을 전해 들은 김수환 추기경이 안규리 상임이사(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와 고찬근 신부와 함께 방법을 모색해 1997년 4월부터 외국인 노동자를 무료로 진료하게 된 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초기엔 서울대학교 가톨릭 교수모임과 의대·간호대 동아리 카사(CaSA)가 주축을 이뤄 시작했으나 지금은 고려대학교, 건국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의료진이 함께하고 있다. 15년 전 학생 신분으로 봉사했던 사람들이 의사가 되고 교수가 되어 제자들과 함께 참여한 것이다. 그만큼 진료과목도 늘어서 웬만한 종합병원 부럽지 않다. ‘ㄷ’자 강당 복도를 따라 진료안내판이 걸리고, 진료책상과 노트북, 의료기기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라파엘클리닉은 매주 40여 명의 의료진이 큰 진료(17개)와 작은 진료(15개)를 격주로 번갈아 진행한다. 큰 진료일에는 300명 정도, 작은 진료일에는 200명 정도의 외국인 노동자와 그 가족, 다문화 가족이 진료소를 찾는다. 오늘은 작은 진료일이라 환자수가 적은 편이라는데도 스태프들은 뛰다시피 다니며 환자들을 돕는다. 진료 접수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단 2시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 사람의 환자라도 더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매주 10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통역과 접수를 돕거나 부모가 진료받는 동안 아이들을 돌보고 약을 배부하고, 우유와 빵, 따뜻한 차를 대접한다.

라파엘클리닉의 대기실은 여느 병원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와글와글 시끌벅적 화기애애하다. 이곳에 오면 고향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내 나라 말로 속 시원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많은 이가 미등록 상태일 텐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경계심 없이 반갑게 악수를 청하고 웃음을 나눈다. 아마도 라파엘클리닉이 아픈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곳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일 게다.

드라마를 봐도, 병원에서 봐도 의사들은 늘 바쁘고 지쳐 보이던데 크리스마스 날에도, 새해 첫날에도 공휴일에도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나와 진료해야 하니 웬만한 각오가 아니면 그 오랜 기간 무료 진료를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환자가 있으니까요. 아무리 힘들어도 환자가 아파서 오시는데 진료를 해야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진료밖에 없으니까요.” 안 상임이사는 다른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미안하다. 라파엘클리닉은 1차 진료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환자를 관리한다. 더 중한 진료가 필요한 환자는 후원 병원들의 도움을 받아 2・3차 진료나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하고 수술비도 돕는다.
“허리랑 다리 아파서 전에 병원 갔어요. 돈 많이 줬어요. 근데 안 나았어요. 이제 거의 다 나았어요. 베트남 가서도 여기 안 잊을 거예요.” 베트남에서 온 A씨도 옆구리 통증으로 몇 년을 고생하던 B(필리핀)씨도 동생이 맹장수술을 받았다는 C(필리핀) 씨도 서툰 한국말이지만 라파엘클리닉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말하고 싶어 했다. 여러 나라 출신의 여러 환자와 대화를 나누었지만 모두 비슷한 대답이다. 너무 너무 고맙다는 말.

그런데도 라파엘클리닉은 부족하다며 미안해한다. 너무 멀리서 와서, 너무 많이 기다려서, 조금밖에 진료를 못해줘서…. 현재 라파엘클리닉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좀 더 쉽게 진료소를 찾을 수 있도록 동두천과 의정부에 지부를 두었고 지방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찾아가는 이동클리닉도 운영하고 있다. 많은 환자 수만큼이나 빡빡한 일정인데도 라파엘클리닉은 더 멀리 더 많은 사람을 위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그 나라 의료기술이 따라오지 못하는 의술을 행하고, 구할 수 없는 약을 뿌리고 오는 것은 그 나라의 의료체계를 망가뜨리는 일입니다.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우리 교수들을 초청해 교육해주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의료 수준이 오늘날과 같은 급성장을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이제는 우리가 받은 혜택을 나누어주어야 할 때입니다.”
라파엘클리닉은 몽골, 미얀마, 라오스 등지에서 해외진료봉사를 하고 그곳의 의료진에게 의술을 전수하고 국내로 초청해 교육을 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을 하기에 재정상 어려움도 많을 텐데 그보다는 우선 환자들의 어려운 삶을 그들의 입장에서 보려 하고 치료의 손길이 필요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면 알려달라고 당부한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그대로 실천하는 라파엘클리닉이다.

– 웹진  2012.01*2 인권(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이야기) 수록-

★ 박영주 님은 국가인권위원회 홍보협력과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