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주신 돈, 봉사하란 뜻”
金추기경 선종 직전 새 건물 짓는데 쓰라며 전재산 340만원 보내줘.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무료 진료소 라파엘클리닉을 17년간 이끌어 온 안규리 서울대 교수가 처음 진료소를 연 계기는 생뚱맞게도 `카레라이스`였다.
1993년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통해 광주에서 한 외국인 노동자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안 교수는 한달음에 광주로 내려갔다. 의사로서 해 줄 일이 없어보이는데 왜 그렇게 했냐는 질문에 그는 “사람이 길을 가다 어려운 사람을 마주치면 지나치기 어려우니까요.”라고 너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막상 내려가도 크게 할 일이 없어 입맛을 잃었다는 수감자를 위해 카레라이스를 만들어서 교도소 입구에 들어섰다. 하지만 경비가 이를 제지하자 옥신각신하던 중 친구로부터 “넌 직업이 의사고 요리랑 상관도 없는데 여기서 카레 갖고 뭐 하냐”라는 핀잔을 들었다. 바로 그때 그녀는 의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냈다.
자세히 알아보니 당시 무려 22만명의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이 한국 의료시스템 제도권에서 철저히 소외돼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보였다.
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진료소를 만들겠다고 하니 김 추기경은 굉장히 좋은 생각이라며 크게 환영했다.
안 교수는 “김 추기경님 말씀에 용기백배해 꼭 진료소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에 뜻을 함께 한 지인들과 혜화동 성당 한켠에서 처음 라파엘클리닉의 문을 열었다”고 회상했다.
1998년 동성고 강당 복도로 진료소를 옮긴 후 라파엘클리닉은 매주 일요일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무료 진료를 이어왔다. 따뜻한 봉사의 손길이 모여 라파엘클리닉은 어느덧 내과, 외과, 피부과 등 17개 과, 의료진만 200여 명을 갖춘 종합 클리닉으로 발전했다. 지난해까지 이곳을 다녀간 외국인 노동자는 파키스탄ㆍ방글라데시ㆍ필리핀 등 78개국 출신 18만4423명에 달한다. 커진 규모와 높은 뜻과는 달리 라파엘클리닉의 시설 수준은 안타깝게도 매우 낮았다. 동성고 복도에서 야전병원 같은 열악한 시설로 환자들을 맞이할 때면 진료소 사람들 모두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 4월 14일 라파엘클리닉은 마침내 다행히 새 둥지를 마련했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1가 8번지에 지하 1층~지상 5층 연면적 1177㎡(약 356평)의 건물을 갖게 된 것이다.이 건물의 가장 큰 벽돌 하나를 놓은 사람 역시 김 추기경이었다. 김 추기경은 선종 직전 라파엘클리닉 후원 통장에 전 재산이었던 340만원을 보냈다.
“저희도 김 추기경님 장례가 끝나고 나서야 알았어요. 아직도 그 340만원은 못 쓰고 있어요. 따로 돈을 빼서 보관하고 입금 내용이 찍힌 통장도 따로 복사본으로 만들어 새 건물에 모셔놨죠. 추기경님한테 돌려드릴 수 없는 빚이니 항상 간직하고 바라보며 매일매일 그 빚을 잘 갚는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하려고요.”
안 교수는 자신이 절대 마냥 선한 사람도 아니고 혼자 힘으로 무료 봉사를 이끌어 온 것도 아니라고 강조했다.
“어디에 꼭 애원하지 않아도 많은 분들이 따뜻한 손길을 보태줘요. 예전에 여기서 봉사했던 의대 학생들은 번듯한 의사가 돼 진료를 해주고, 초창기 봉사 활동에 참여했던 분들은 이제 자제분들과 함께 진료소를 찾아주세요. 정말 감사하죠.” “저를 포함해 진료소에 계신 분들 모두 거창한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주말마다 습관처럼 기타를 치는 사람들이 거기서 행복을 얻듯 저희도 봉사가 습관이 돼 거기서 기운을 얻고 행복해요.”
2014.05.14 | 매일경제 김제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