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천사 이야기

[한성구 교수의 제멋대로 여행기] - '사마르칸트의 비비하님궁전'

작성자
raphael
작성일
2019-09-03 14:14
조회
2606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아주 중요한 요충지이다. 그러니만큼 여행자에게는 볼 것도 많고 얻어듣는 이야깃거리도 풍부하다. 특히 이슬람 건축은 정말 대단하다. 아랍에서 수학이 발달했으니 이슬람 건축 중에는 당연히 눈이 휘둥그레지는 건축이 많다. ‘이 민족을 알고 싶으면 건축을 보라’…… 사마르칸트 지역의 정복왕 이었던 아미르 티무르가 한 말이 아직도 많이 회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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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하님 모스크 15세기 사마르칸트. 아름다운 비비하님을 위해 그 당시 최고의 역량을 모아서 짓던 아름다운 모스크였지만 이후 쇠락했다.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 될 뻔했던 비비하님 모스크 이야기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위대한 정복왕이었던 아미르 티무르왕에게는 아주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비비하님이다. 왕은 이 아름다운 아내를 너무도 사랑하고 아꼈다는데 왕은 항상 궁을 비우고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왕은 혼자 지내는 아름다운 아내를 위해서 그 당시 최고의 모스크를 짓기로 한다. 그 당시 최고의 건축가를 불러와 호화로운 재료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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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르 티무르왕의 동상. 말을 탄 정복왕의 모습이다. 타쉬겐트

그런데 잘 나가던 건축 과정에 돌발상황이 터졌다. 어느 날 이 모스크 건축을 보러 왔던 아름다운 비비하님을 본 건축가는 그만 짝사랑에 빠져 버렸다. 이후 일은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아름다운 비비하님의 모습만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왕이 돌아올 시간은 가까워오는데 자기 이름을 딴 아름다운 모스크의 진척이 없어 비비하님의 애가 타 들어간다. 어떻게든 건축가의 능력을 건축에 쏟게 하려고 건축가를 구슬려보아도 건축가는 오직 비비하님을 향한 사랑 밖에는 안중에도 없다.

어느 날 비비하님은 건축가에게 삶은 달걀을 두 개 보낸다. 하나는 겉 껍질이 하얀 달걀, 또 하나는 겉 껍질이 누런 색의 달걀이었다고 한다. 건축가는 처음 이 선물을 받고 어안이 벙벙했던 것 같다. 이게 무슨 뜻일까? 끙끙대던 건축가는 갑자기 무릎을 친다. 비비하님의 수수께끼 같은 선물의 뜻을 불현듯 이해하게 된 것이다. 비비하님의 뜻은 ‘여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똑같다. 달걀의 겉껍질이 달라도 먹어보니 똑같지 않던가? 그러니 나한테 오매불망 매달리지 말고 다른 여자를 찾아라......’

이런 뜻을 이해한 건축가는 비비하님에게 답을 보내게 된다. 이번에는 똑같은 모양의 병 두 개에 하나는 물을 담고 또 다른 병에는 색이 없는 술을 넣어서 보냈다고 한다. 똑같아 보이지만 먹어보니 다릅니다……

밀고 당기던 비비하님과 건축가는 결국 담판을 하게 된다. 건축가는 비비하님에게 “딱 한 번의 키스를 허락해 준다면 자기가 마음을 돌리고 건축에 매진하겠다”라고 약속을 하고 비비하님도 ‘딱 한 번의 키스 정도라면……’ 하는 마음에 이를 약속하게 되었단다.

결국 비비하님과 건축가는 한 번의 키스를 하게 되었다. 그 키스가 어찌나 격렬했는지 비비하님의 입술이 퉁퉁 붓는 일이 생기게 되었는데 아뿔싸, 아미르 티무르왕이 인도 원정에서 예정보다 훨씬 일찍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온 왕이 비비하님의 부은 입술을 보고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왕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결국 비비하님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 건축가는 낌새를 채고 멀리 멀리 도망갔다는 이야기이다. 이후 가장 아름다웠던 미완성 비비하님 모스크는 버려진 채로 있었다. 혹시 사람이 들어가면 어디선가 돌이 떨어져서 사람이 상하는 일이 생겨서 흉가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 전설의 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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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하님 모스크 앞의 커다란 코란을 펼치기 위한 석조 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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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하님 모스크의 내부. 흉가 같고 천정에서 돌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건은 훨씬 전 고대 그리스에도 있었다. 세계 역사상 손꼽히는 정복왕 이었던 알렉산더 대왕이 주인공이다. 알렉산더에게는 아주 총애하는 캄파스페라는 이름의 애인이 있었다. 항상 곁에 두고 싶었지만 왕은 전쟁터에서 나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위험한 전쟁터에 캄파스페를 데리고 다닐 수가 없으니 그 대신 캄파스페의 초상화를 지니고 다닐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 당시 최고의 초상화가인 아펠레스를 부른다. 아펠레스에게 주어진 임무는 캄파스페의 아름다운 나신을 그리는 것이었다. 알렉산더가 원했던 것은 그냥 초상화가 아니라 아름다운 캄파스페의 누드였다. 주저하는 캄파스페에게 화가 앞에서 옷을 벗게 한 알렉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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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sco Trevisani: Apelles Painting Campaspe 1720 Norton Simon Museum Pasadena

여러 날이 지난 후 알렉산더는 캄파스페의 초상화가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해서 화실을 불쑥 찾아가게 된다. 문을 연 알렉산더는 눈 앞에서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화가 아펠레스와 캄파스페가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알렉산더의 눈에 시퍼런 불꽃이 튀는 순간. 아펠레스와 캄파스페는 얼어 붙었다. 이제 저 둘은 죽었구나…… 주변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알렉산더는 마른 침을 삼키고는 다가왔다. 그 다음 장면은 가히 놀랍다. 한 손으로는 아펠레스를 또 다른 손으로는 캄파스페를 잡아서 가까이 해주면서 저 둘을 축복해주었다. 너희 둘이 사랑한다니 너희들을 축복해주겠다는 것이 이야기의 요지이다.

이 이야기는 알렉산더가 얼마나 대범하고 쿨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예로 많이 이야기된다. 비비하님의 이야기와는 완전 반대되는 이야기이고 알렉산더가 대범하고 쿨한 사람이라면 티무르왕은 속좁은 사람이었을까? 과연 그럴까?

티무르왕에게 비비하님은 어떤 존재이었을까? 아마도 ‘대체불가’한 존재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비하님의 퉁퉁 부은 입술을 본 왕은 우선 배신감에 치를 떨고, 곧이어 상실감에 좌절했다. 나아가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어 엄청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가히 카오스 상태에 빠졌음에 틀림없다. 반면 알렉산더에게 캄페스페는 ‘대체가능’한 존재 아니었을까? 이 빠진 그릇은 버리고 다시 사면 된다는 생각은 아닐까?

그건 그렇고…... ‘껍질의 색이 달라도 먹으면 똑같다’라는 비비하님의 말은 꼭 육체적인 사랑을 빗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에 반해 물과 술의 비유는 좀 정서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흔히 남자는 ‘짐승’이라 육체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면이 좀 더 크고 여자는 좀 더 감성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면이 더 크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여행자에게는 이 점이 참 인상적이었다. 여자인 비비하님이 육체적 사랑을 말하고 남자인 건축가가 정서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닌가?

또 한 가지…… 캄페스페는 왜 아펠레스에게 빠졌을까? 세계 최고의 영웅한테 사랑을 받았는데 말이다. 너무 잘난 남자, 세상을 주무르는 남자 보다는 신분은 훨씬 낮지만 다정다감하고 예술적 감성이 있는 남자한테 끌렸을까? 알렉산더가 캄페스페에게 화가 아펠레스 앞에서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을 때 캄페스페는 아마도 심한 수치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Ottin의 ‘알렉산더의 명령에 의해 아펠레스 앞에서 옷을 벗는 캄파스페’를 보면 캄파스페의 표정이 좋지 않다. 더욱이 테에플로의 그림 속 캄파스페와 알렉산더의 표정은 그다지 애틋해 보이지 않고 캄페스페는 좀 뾰로통해 보인다. 남녀간의 일은 둘 만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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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e Ottin: Alexander의 명령에 따라 Apelles 앞에서 옷을 벗는 Campaspe 1883 루브르 박물관 파리. 애인이자 왕인 알렉산더의 명령으로 옷을 벗어야 하는 캄파스페의 표정이 좋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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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i Battista Tiepolo: Alexander the Great and Campaspe in the Studio of Apelles 1740 Paul Getty Museum. 이 그림에서 알렉산더와 캄파스페의 다정한 교감은 보이지 않는다. 상반신을 벗은 캄파스페의 표정이 뾰로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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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etano Gandolfi: Alexander Presenting Campaspe to Apelles 1793. 흠집이 난 그릇은 남에게 주어 버리는 알렉산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