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천사 이야기

[인터뷰] 지역의료의 성공사례 - 김인권 여수애양병원 명예원장

작성자
raphael
작성일
2020-02-21 10:32
조회
2949

김인권 원장


여수애양병원 명예원장
한센복지협회 회장
現 용인예스병원 병원장

‘지역의료의 성공사례’라고 강의 주제를 선정했는데, 거창하게 보이지만 사실 그렇게 대단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성공사례’와 같은 좀 과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그냥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게요.

저는 현재 용인 예스병원의 병원장이자, 여수 애양병원 명예원장 및 한센복지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인권입니다. 사실은 여수 애양병원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퇴직했습니다. 병원을 떠나오면서 어디서 살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대도시로 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오랫동안 기르던 나무와 반려견도 있고, 시골에 오래 살아서 도시에는 적응이 안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처갓집 근처의 온양에 터를 잡았습니다. 애양병원 퇴직 후에 어떤 병원에서 받아줄까 싶었는데, 지금의 병원에서 저를 병원장까지 만들어 주셨네요.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토요일도 가서 수술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집사람은 싫어하지만, 저는 아직까지 환자들을 만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저는 1977년에 약 2개월간 국립소록도 병원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소록도는 한센인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제가 의사면허를 딸 당시에는 레지던트 4년차를 이수하려면 6개월 동안 무의촌에서 진료를 해야 했습니다. 저를 아끼시는 교수님께서도 ‘전염의 위험성이 있으니, 가지 마라’고 말렸고, 저 또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의사인데 환자를 피하는 것은 제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한센병을 일으키는 나균은 전염성이 크지 않고, 초기에 치료한다면 큰 후유증 없이 낫는 병인데, 한센인에 대한 인식이 워낙 좋지 않다 보니, 환자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참 마음이 아팠기 때문에, 제가 가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많겠다고 생각해서 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렇게 두 달간의 소록도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선택은 삶의 행로를 정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공중보건의로 다시 소록도를 찾아 3년동안 근무를 했습니다. 한센인들은 신경에 마비가 오는 증상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손발이 구부러지고 피부의 궤양이 생겨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또한 자율신경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땀이 나지 않게 될 확률이 큽니다. 저는 관절의 변형이 온 환자들에게 관절을 펴주는 수술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소록도에 처음 갔을 때는 막막했습니다. 실제 경험도 없고 학교에서 배운 바가 없어서 외국의 책 등을 참고하여 방법을 고안해야만 했습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수술기구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창고를 뒤져가며 기구를 찾아 수술을 진행했습니다.

소록도에서 공중보건의 생활을 마친 후, 여수 애양병원의 과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여수 애양병원은 목포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의사 윌리 포사이트가 길가에 쓰러져 있던 한센인을 발견하여 진찰을 한 것이 애양병원의 시초입니다. 이후 로버트 윌슨이라는 의사가 포사이트를 기리기 위해 설립한 광주나병원이 여수로 이전하면서 지금의 애양병원이 되었습니다.

제가 애양병원에 처음 부임을 했을 때는 DDS(한센병 치료제)의 도입으로 우리나라 한센병 환자들이 크게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대신 소아마비 후유증 환자와 지체장애인의 재활수술을 전문적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소아마비 예방 백신이 개발되면서, 80년대 후반부터는 인공관절 수술을 전문적으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술 초창기에는 한국의 의료기술이 미흡하여 미국 선교부를 통해 인공관절 기구와 함께 기술을 전수 받았었는데, 지금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인공관절 수술이 이루어지는 병원이 되었습니다.

애양병원은 가난한 환자에게 저렴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또 그마저도 부담이 되는 환자에게 사정을 살펴 의사의 재량으로 감면해 줄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환자들이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병원 경영상으로는 무리가 있었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직원들이 많은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의료 수가를 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병원이 언제까지 견딜 지는 몰라도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서 현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애양병원의 정신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꼭 필요한 검사만 실시하고, 입원환자의 수도 줄입니다. 하루에 수술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술을 부실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한 팀원들과 많은 수술을 진행했기 때문에 오히려 효율적인 수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애양병원이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의료수준이 열악한 나라의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988년 케냐를 시작으로 파키스탄, 미얀마 등 20년 동안 7개국을 돌면서 해외의료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1회성에 그치는 지원이 아닌, 현지 거점병원과 협력을 해서 적어도 5년 이상 지원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여러 의사들이 뜻을 같이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환자로는, 2017년 서울대학교 이종욱 교수팀과의 협업으로 라오스 미타팝병원에서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걸을 때 쪼그리고 걸어야 하는 청년을 수술했습니다. 나중에 그 청년이 편지와 함께 자신의 사진을 보내 왔는데, 구부정하지만 서 있는 사진이었어요. 그런 편지를 받을 때 마다 도와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며, 기쁜 마음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즐기면서 다른 이들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제 기운이 닿는 데까지 환자를 보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