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천사 이야기

[한성구 교수의 제멋대로 여행기] - 상트 페테르부르크

작성자
raphael
작성일
2021-04-27 16:40
조회
2243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언제나 여행자를 들뜨게 한다. 네바 강가 겨울궁전이 미술관으로 탈바꿈해서 정말 대단한 컬렉션을 보여준다. 로마노프 왕조의 수집품인데 러시아 그림은 거의 없고 다 유럽의 예술품들이다. 러시아 그림은 이 도시의 러시아 미술관에 가야 볼 수 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 옛날에는 겨울궁전이었다.

에르미타주의 그림을 즐기던 여행자는 눈에 띄는 그림을 하나 보게 된다. “어? 이 그림은 똑같은 것을 비엔나의 미술사 박물관에서 본 것인데…… 왜 여기서 또 볼까?” 비엔나의 그림은 Corregio의 그림인데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 그림의 화가는 Lemoyne이다. 코레지오는 16세기때의 화가인데 이 화가는 18세기의 프랑스 화가이다.

이 그림은 쥬피터가 이오를 겁탈하는 그림이다. 쥬피터는 대단한 난봉꾼이었는데 어느 날 아름다운 이오를 보고 쫓아간다. 두려움에 빠진 이오는 온 힘을 다해서 도망을 쳤지만 쥬피터는 훨씬 빠른 속도로 이오를 쫓아와서 검은 안개로 둔갑을 한다. 깜깜한 안개에 휩싸인 이오는 앞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어 결국은 쥬피터에게 겁탈을 당했다는 것이 신화의 이야기이다.



이 그림은 검은 안개 속에서 드러나는 쥬피터의 얼굴을 아주 극적으로 표현한 수작이다. 이오를 안는 쥬피터의 팔은 섬뜩하기도 하다. 에르미타주에 있는 그림은 18세기에 그려졌고, 비엔나에 있는 그림은 16세기로 약 190년의 차이가 난다. 오리지널인 비엔나의 그림이 훨씬 예술적 완성도가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사화는 버젓이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걸려있다. 에카테리나 여제의 수집품이다.

이 그림을 보며 이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이오는 낯선 남자가 잡으러 오니 두려웠고 본능적으로 도망을 쳤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까만 안개가 이오를 휘감으니 동서남북을 구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공포에 휩싸인 이오에게 가해자의 얼굴이 천천히 드러나고 어느샌가 남자의 억센 팔이 이오를 안고 있는 장면이다. 이오의 표정이 어때야 할까? 공포에 일그러진 얼굴이 되어야 맞지 않을까? 이 그림 속의 이오는 쥬피터에 안겨 감미로운 표정, 황홀한 표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성범죄는 왜곡이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가해자의 시각, 대개는 남성의 시각인 셈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부근에는 여름 궁전도 있다. ‘Peterhof(페테르고프궁)’이라고 부른다. 여름 궁전의 정원에는 분수 사이에 멋진 조각들이 있다. 그런데 이 조각들은 거의 대부분은 유럽의 궁전 또는 미술관에 있는 뛰어난 조각들의 복각이다.

여름 궁전에 있는 비너스는 18세기의 작품인데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메디치의 비너스하고 똑같다.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것은 기원후 1세기 것이니 여름궁전에 있는 것이 ‘짝퉁’인 셈이다. 하지만 우피치에 있는 비너스는 진짜 오리지널일까? 진짜는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오래 되긴 했지만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것도 ‘짝퉁’인 것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은 맞나 보다.



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는 복제품이 이렇게 많을까? 그 이유는 러시아가 급격적으로 유럽화를 하였기 때문이다. 피터 대제는 어릴 때 신분을 감추고 네델란드의 조선소에서 공원(工員)으로 일을 했던 경험이 있다. 당시 유럽의 발전을 보고 낙후된 러시아를 발전시키려면 유럽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앙아시아의 한 나라였던 모스크바공국에서 유럽화를 이루는 일은 쉽지는 않았다. 러시아의 정체성을 슬라브주의라고 한다면 피터 대제가 추진하는 유럽화는 슬라브주의를 깨뜨려야 해야 할 과제였던 것이다.

이 갈등은 매우 치열했었다. 모스크바는 지리적으로도 중앙아시아에 가깝고 러시아의 정체성을 띠고 있는 수도인데 아주 완고한 슬라브주의자들의 소굴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개화기에 단발령으로 상투를 자르는 어명이 있었는데 러시아에서는 수염을 자르라는 칙명이 있었다. 말을 안들으면 엄청난 수염 세금을 냈어야 했다. 러시아 사람의 의식을 유럽화 시키는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짜르에게 충성하는’ 창기병까지도 유럽화에 반대해서 목숨걸고 촛불시위를 했다. 피터 대제는 모스크바를 버리고 새로운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만든다. 유럽화 된 계획 도시를 만든 것이다.



▲바실리 수리코프, <창기병의 새벽녘 처형>, 1881, 트레차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짜르가 추구하는 유럽화는 완고한 슬라브주의자들에게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짜르를 가장 충성해왔던 창기병도 촛불 시위로 반항하였다.




▲발렌틴 세로프, <피터 대제> - 부분 발췌, 1907, 트레차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또 다른 러시아 화가 발렌틴 세로프가 그린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건설을 독려하는 피터 대제를 보면 피터는 성큼성큼 걷고 그 뒤를 따르는 시종들은 종종 걸음으로 좇는다. 유럽화에 대한 열망의 크기만큼 걸음걸이도 다르다 “나를 따르라!”의 전형적인 리더였던 것이다. 그림 속에 피터 대제는 키가 시종들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있다. 실제로 피터 대제는 2미터 가까운 거구였다고 한다. 실제로 진짜 성큼성큼 걸었을 것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완공되었다. 피터 대제는 자신이 살 궁을 맨 마지막으로 지었다고 한다. 유럽화된 도시가 러시아의 수도가 되었다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사람들의 의식을 유럽화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짜르는 국민을 빨리 유럽화 시키는데 예술품이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의 고급 미술품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많이 사왔다고 한다. 살 수 없는 것은 ‘짝퉁’이라도 빨리 만들어서 러시아 사람들에게 하나라도 더 유럽식 미술품을 보여주려고 했던 조바심이 지금 에르미타주에 ‘짝퉁’도 같이 걸려 있는 이유이다.



▲니콜라이 게, <피터 대제가 황태자 알렉사이를 여름궁전에서 힐난하다>, 1871, 트레챠코프미술관, 모스크바. 황태자는 슬라브주의자이어서 아버지 피터 대제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감옥에 간 황태자는 옥사했다. 쏘아보는 짜르와 시선을 피하는 황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