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는 사회 공헌 아닌 사회적 책무”

[아시아엔=김남주 <서울대총동창신문> 기자] 서울대 의대 안규리 교수는 유전성 신장질환, 장기이식, 면역학 분야에서 연구와 임상의 리더로 손꼽히는 의학자다. 안규리 교수는 △이종이식 연구 △뇌사장기 이식의 활성화 및 이식자 생존율 향상을 위한 연구 △한국의 신장이식 데이터베이스 구축 △국내 만성신장병 환자에 대한 세계적 규모의 집단(코호트) 연구 △염기서열 분석을 통한 유전성 신질환(상염색체 우성 담낭신) 치료 및 연구를 해왔다.

안규리 교수는 20년 전 혜화동성당에서 이주민노동자 진료를 시작해 지금은 해외까지 봉사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진료 대기 중인 외국인 환자들이 많네요. 일주일에 몇 명이나 오나요.

“350명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치과 등 몇몇 과는 주중에도 열지만 대부분 진료를 일요일에 하다 보니 많아요. 저도 주일밖에 시간을 낼 수 없고요.”

-외국인노동자들 상당수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않나요.

“사업장에서 부담하는 보험료를 받아서 빚을 갚는 데 쓰는 분들이 많아요. 한국 올 때 큰 빚을 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다보니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죠. 업무시간이 길어 병원 갈 시간이 없고 또 주변에 마땅한 병원이 적기도 하고요. 이곳을 찾는 외국인 환자가 많습니다.”

-의사부터 모두 무급 봉사자인가요.

“그럼요. 의사, 간호사, 약사 풀이 200여명, 그 외 통역, 청소, 간식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들이 300여명 됩니다. 재단 등 상주해서 일하는 유급 직원은 10여명 정도 되고요.”

안 교수는 의사로 봉사하는 분들의 다수는 서울대 출신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서울대 출신들이 쌀쌀맞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안 교수는 “나는 말을 잘 못한다”며 준비한 PT 자료로 라파엘클리닉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외국인노동자를 김수환 추기경을 통해 알았어요. 우리나라 산업현장에서 온갖 일을 다 하면서 아프거나 심한 상처를 입어도 진료를 못 받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뭔가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1997년 선배교수님, 가톨릭학생회 학생 4명과 함께 무료진료지만 끝까지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왔네요.”

안 교수의 조용한 성품 때문에 라파엘클리닉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라파엘클리닉이 해온 일은 연예산 수백원 규모의 사회기관을 뛰어넘는다.

라파엘클리닉은 17개 진료과와 검사실을 갖춰 한 회 평균 300명, 연간 1만600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한다. 2014년 4월 염수정 추기경의 지원 아래 라파엘센터라는 독립된 진료공간도 갖췄다. 2007년 2월에는 사단법인 라파엘인터내셔널을 설립, 몽골, 미얀마, 네팔, 필리핀 환우들을 위해 지역의료인 역량강화 사업을 펼치고 있다. 최근 ‘라파엘 아카데미’를 개설해 시니어, 예비 의료인 교육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참 많은 일을 해오셨어요.

“제가 한 건 아니고요. 라파엘클리닉 모든 사람이 함께 이룬 일이에요. 처음 시작할 때 후배들에게 ‘교수가 무사안일하게 살면 안 된다’ 하는 어떤 예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함께 했던 후배들은 다 잘 됐나요.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던 후배 학생들도 교수가 많이 됐어요. 사람들과 더불어 약자를 돌볼 줄 알고 선배 후배와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잘 되더라고요. 그 후배들이 지금 열심히 진료를 해주고 있어요.”

-경제적인 어려움은요.

“돈이 부족해 진료를 못한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기적이지요. 지학순주교 정의평화상, 상허대상, 아산상, 포스코 청암 봉사상 등의 상금이 여러 큰 사업을 할 수 있는 마중물이 돼 줬어요. 때론 봉사하는 학생이 본인이 받은 상금을 기부하기도 했어요. 호암상 상금으로는 ‘라파엘아카데미’를 성장시키는 동력으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20년 이어오며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환자, 봉사자, 후원자들의 믿음이죠. 보잘 것 없는 우리를 믿고 몸을 맡겨준 환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없죠. 그리고 작은 것들을 갖고 와서 은하수처럼 밝혀주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던 봉사자, 힘들 때 격려해주고 매월 꼬박꼬박 1만원을 후원해 주신 분들 덕분에 지금의 라파엘클리닉이 있습니다. 라파엘 천사가 누군가를 치료자로 만드는 천사예요.”

-2층 로비에 김수환 추기경의 계좌 동판이 있던데.

“돌아가실 때 남은 돈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그 빚 때문에 도망도 못가고 있어요(웃음).”

-서울대 사회공헌교수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으셨어요.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를 설립하셨던 유영제 교수님이 시작을 하셨어요. 거기에 ‘국경없는 교육가회’를 이끌어 오셨던 김기석 교수님이 합세해 해외봉사 사업을 함께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죠.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서울대 학생들이 선한 인재로 성장하는 데도 도움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있었고요. 제 입장에서는 라파엘클리닉을 운영해 오면서 다른 분야의 도움이 늘 필요했고요. 해외 의료봉사를 가면 우물을 파야 하고 화장실도 고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교육이니까 ‘미네소타 프로젝트’처럼 ‘서울대 프로젝트’를 기획해 아시아의 어려운 국가를 돕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또 웹베이스, 페어 등의 형태로 함께 모이고 도움받을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장을 만드는 일이 1순위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타적인 성품을 타고나신 듯해요.

“타고난 거 없습니다. 나눔도 연습이에요. 서울대 첫 내과 여교수가 얼마나 팍팍하겠습니까. 신장내과는 소수점 아래까지 따지는 과에요. 나눔을 통한 기쁨 이런 게 제 삶의 방향까지 결정한 것 같아요.”

‘1회 서울대봉사상’ 수상…이주민노동자 무료진료 20년

“‘서울대 프로젝트’ 기획해 아시아 저개발국 인재 양성”

-이주민노동자를 20년 만나오셨으니 다문화에 대한 관심도 클 것 같은데.

“결국 우리도 아시아인이라는 동질감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제도적 도움에는 한계가 있어요. 이방인이라고 느끼고 받은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는 외국인들이 참 많아요. 빠르게 다문화사회로 가고 있지만 상황은 오히려 좋지 않아요. 다문화 가족의 아이들이 열악한 상황에서 컸을 때 우리나라 구성원으로서 건강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고 진심으로 마음을 줘야 합니다.”

-이주민노동자들의 병력 데이터도 많이 쌓여 있죠.

“보건학을 연구하는 분들이 우리가 갖고 있는 DNA 패턴을 분석하면 유의미한 논문이 나올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 새로 유입되는 유전병부터 질환 등을 알 수 있을 테고. 이 분야에 관심 있는 분이 계시다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요즘도 서울대병원서 진료를 하시죠.

“매주 150명 정도 보고 있어요.”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의대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아요. 어떠세요.

“학생들이 도전적으로 나서길 바라지요. 대학은 불안정을 즐기려고 들어오는 건데 안정을 찾다 보면 오히려 그 자체가 스트레스가 됩니다. 사람 몸이 제각각이라 의학은 예측이 어려운 분야에요. 그런 것들을 도전으로 받아들이면 불안정에 대한 안정성이 생길 것 같아요. 웨이브가 가장 안정적이에요. 플랫은 죽은 상태죠. ‘포스트 알파고 시대’ 의사의 일은 뭘까, 가끔 생각하는데, 저는 이제부터 무한대의 의술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이해하는 게 무엇이며 이 사람들의 정신세계까지 한번쯤 만져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수많은 데이터에 의존하던 만남은 기계에 넘겨주고 환자와 의사와의 만남은 좀 더 성숙하게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 미래를 대비하고 공부해야 할 거예요.”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뭔가요.

“지속가능성이요. 나눔이 뭘까, 사회공헌? 사회공헌교수협의회라고 했을 때 공헌, 소셜 콘트리뷰트. 그게 아닌 것 같아요. 구글에 소셜 콘트리뷰트(Social contribute 사회공헌)라고 하면 안 나와요. 리스판서빌리티(Responsibility 책무). 나눔은 남의 아픔을 끌어안는 것, 그것이 우리 책임일 겁니다.”

-황우석 사태 경험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당시 모든 걸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 갈 생각도 했어요. 그러다 인도를 가게 됐는데 거기서 지금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죠. 그 전까지는 라파엘클리닉 일이 연구, 교육, 진료와 더불어 하나의 일 중 하나였지요. 이후 이것만큼은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독신으로 지내고 계세요.

“레지던트 될 때 연구에 많이 참여했어요. 담당 교수님이 사이언스를 중시하셔서 외국에 나가 면역학까지 공부하게 됐죠. 눈앞에 닥친 도전과제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때는 그런 여자들을 드세게 봤죠. 예쁘지도 않았고요(웃음). 편안한 삶을 사는 선택은 누구와 엮이지 않아도 가능하지 않을까, 같이 있어도 외로울 수 있고요.”

-끝으로 한말씀 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몰라줬으면 좋겠어요. 몰라줬을 때 인생이 편해요. 자유롭고.”

안 교수는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서울대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쳐 1984년 내과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1992년 신장내과 분과전문의, 1999년 신장투석전문의가 됐다. 그는 1994년 4월 서울대 교수가 됐다. 안 교수의 부친은 한국 과학계의 선구적 역할을 한 고 안동혁(경성공업학교 화학공업과 1926년 졸업) 전 한양대 명예교수 다. 딸이 과학자로 성공하라는 뜻에서 ‘퀴리 부인’의 이름을 따서 ‘규리’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동안 국내외 학회지에 100편 가까운 논문을 발표했고 형질전환 유전자 돼지와 관련된 3건의 특허도 출원(2편은 등록완료)했다. 1997년 부활절에 문을 연 라파엘클리닉 활동을 통해 20년 넘게 인술을 베풀고 있다. 그는 이 공로로 2017년 호암상(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또 서울대병원 공공의료사업단 부단장으로 ‘공공보건의료센터’의 실무를 관장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이 기사는 서울대총동창신문 2017년 10월호에 보도된 것을 일부 업데이트하여 <아시아엔> 독자들께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