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진·봉사자 2000여 명…20년간 23만명 환자 돌봐
故 김수환 추기경도 애착…마지막 미사·유산 남겨
1992년 한국에 돈을 벌러 온 두 명의 파키스탄 노동자와 브로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분을 참지 못한 노동자들은 브로커를 칼로 찔렀고, 이들은 이국 땅에서 사형수가 됐다. 이 소식은 천주교 인권위원회에 전해졌고 고(故) 김수환 추기경(1922~2009년)은 이들의 사연을 들어 보라며 안규리 서울대 의대 신장내과 교수(라파엘클리닉 대표·당시 서울대 임상강사)를 보냈다. 안 교수는 직접 만든 카레까지 챙겨 갔지만 음식물 반입은 허락되지 않았다.
안 교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의료밖에 없었다.
당시 약 22만명에 이르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안 교수와 김전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라파엘클리닉 상임이사)가 함께 나섰다. 서울대 가톨릭학생회 소속 의대생 4명도 힘을 보탰다.
이들은 서울 혜화동성당으로 향했다. 외국인 노동자 무료 진료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1997년 4월의 일이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2017년, ‘일요일의 천사’ 라파엘클리닉이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받게 됐다. 서울대병원 연구실에서 만난 안 교수는 “행복한 일을 하고 그걸로 기쁨을 누렸는데 상을 받는 게 미안하다”며 “삶이라는 건 이렇게 서로 행복하게 빚을 지는 일인 것 같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시상식은 다음달 1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린다.
―시작부터 힘든 일이었는데.
▷’괜한 일을 벌였구나’ 하는 갈등도 있었다. ‘이게 될려나’ ‘약도 없는데 사람들은 와 있고’ 걱정이 많았다. 말 그대로 구걸을 했다. 한 번 왔다 간 사람들은 차마 그냥 가지 못했다. 의료진은 미용실 의자를 갖고 와서 진료하고, 환자를 부를 때 필요한 마이크를 노래방에서 가져오기도 했다. 한 번 와 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나 스스로도 옳은 진료를 하고 있나 자괴감이 들었지만 첫날 34명의 진료를 마치고 나서는 정말 행복했다. 생생하다.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은.
▷외국인 노동자 무료 진료소를 만들겠다고 하니 뛸 듯이 기뻐하셨다. 추기경께서는 라파엘클리닉을 너무 좋아하셨다. 이곳에 오셔서 노래도 불러주시곤 하던 ‘혜화동 할아버지’였다. 공적으로 한 마지막 미사가 라파엘클리닉 10주년 기념미사였고, 돌아가시면서 모든 돈을 이곳에 남기셨다. 추기경님 통장에 700만여 원이 있었는데 빚을 갚고 나니 340만원 정도가 남았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어른이다.
―현실적인 고민도 많았을 텐데.
▷주변에서 ‘네가 마더 테레사인 줄 아느냐’고 했다. 테레사 수녀는 아니지만, 나에게 100분의 1이라도 테레사 수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100명 모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에는 그런 분들이 적어도 100명은 있었다. 일요일에 진료가 끝나고 텅 빈 건물을 볼 때면 마치 은하에 모여 있던 별들이 다시 흩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여기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별’이었던 거다.
―지난 20년 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지난 20년간 23만명의 환자를 돌봤다. 혜화동성당, 서울 동성고 복도 한편부터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무상 임대해준 성북동 라파엘센터까지 옮기면서 환자는 계속 늘었다. 발 벗고 나서 준 분들이 기적처럼 늘 있었다. 이제는 의료진 500여 명을 포함해 연간 2000명 정도가 함께하는 단체가 됐다.
―몽골 등 해외에도 도움을 주는데.
▷한국전쟁 직후 의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건 미국의 ‘미네소타 프로젝트’ 덕분이었다. 가난하지만 똑똑하고 자존심 있는 한국인들을 위해 미네소타대에서 서울대 의대 교수 77명을 데려다가 아낌없는 후원을 해주며 한국 의료계의 기반을 닦아준 것이다. 이제 우리도 돌려줄 때가 왔다. 10년 전부터 몽골을 시작으로 한 라파엘인터내셔널 사업을 미얀마 등에도 확대하려 한다. 북한에도 인도적 지원을 펼쳐야 한다. 의료는 인권이기 때문에 이 분야만큼은 중단이 없어야 한다.
―의료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근 몇 년간 라파엘의 행정업무를 총괄했는데 다시 진료 현장으로 나가고 싶다. 의료 분야는 과학혁명을 거치며 정말 큰 것들을 잊었다. 환자를 컴퓨터로 만나는 게 아니라 직접 손을 잡아주고 싶다. 특히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는 더 절실하다. 이곳 봉사자들은 일요일에 쉬고 싶은 마음을 접고 온다. 자신들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눈빛들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택이 때로는 사회의 삶과 죽음을 가른다. 이러한 선택들이 한국 사회의 극도로 불행한 소외계층에 대한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함께한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라파엘클리닉의 주인은 이주노동자들과 후원자들이다.
연간 최소 비용이 5억원 정도 들기 때문에 정기 후원자들이 조금 더 늘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지금은 필요 금액의 5.9% 정도 들어오는데, 이조차 너무 감사하다. 이름을 다 언급하기 힘들 만큼 따뜻한 마음을 나눈 수많은 의료진과 봉사자, 그리고 길거리 공연으로 돈을 모아준 가수 이문세·노영심·하림 씨 등 이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기적을 만들었다. 어느 날 밤에 생각해도 다 그리울 사람들이다.
[이윤재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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