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천사 이야기

[한성구 교수의 제멋대로 여행기] - 아카마신궁

작성자
raphael
작성일
2020-05-26 14:50
조회
2902

한성구 교수의 '제멋대로 여행기' - 아카마신궁


시모노세키는 일제시대부터 관부연락선이 있던 곳이기도 하고 더 옛날에는 조선통신사가 대마도를 거쳐서 혼슈에 처음 상륙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부관페리가 다니는 우리와는 아주 가까운 곳이다. 시모노세키는 혼슈의 입구인데 이곳에 아주 볼 것이 많다. 우리나라와는 악연인 명치(메이지)유신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이곳에서 청나라 이홍장을 불러서 강화조약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일본 역사상 가장 이야깃거리가 많은 사건은 전국시대와 겐페이(源平) 전쟁을 꼽는데 겐페이 전쟁의 최후의 전투였던 단노우라 (檀ノ浦) 전투가 바로 이곳에서 벌어졌다. 겐페이 전쟁은 무사집단인 겐지(源氏: 미나모토)와 헤이케(平家: 다이라)의 싸움이다. 헤이케의 우두머리인 다이라노 키요모리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사무라이 정권을 세웠다. 헤이케의 위세가 얼마나 심했던지 ‘헤이케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유행어가 아직도 전해온다. 헤이케의 딸은 천황의 부인이 되고 거기서 얻은 아들이 어린 나이에 천황이 되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울기 마련…… 헤이케 타도를 외치며 겐지를 비롯한 여러 세력이 연합을 하면서 경국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겐페이 전쟁에서 승리한 겐지는 가마쿠라 막부를 열게 되는데 일본 역사상 첫 막부이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 고려의 무신정권과 거의 비슷한 시기이다.

서론이 길었다. 시모노세키에는 아주 인상적인 신궁이 있다. 아카마 신궁(赤間神宮)인데 간몬 해협  바로 앞에 있다.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다이라노 키요모리의 아내와 천황의 어머니인 딸, 그리고 외손자인 어린 천황 이렇게 셋은 바다에 몸을 던진다. 여덟 살 나이에 외할머니의 품에 안겨 바다에 몸을 던질 때, 외할머니는 외손자를 안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이제 용궁으로 갑니다.” 따라서 바다에 몸을 던진 헤이케 무사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이렇게 전쟁은 끝났다. 
시모노세키의 아카마신궁. ‘우리는 용궁에 간다’라는 마지막 말을 따라 용궁의 모양으로 지어졌다.

 

아카마신궁은 단노우라 전투가 있었던 해협 바로 앞에 서 있다. 게다가 ‘우리는 용궁에 간다.’는 외할머니의 말을 따라 이 신궁은 용궁의 모습을 연상케 만들어졌다. 일본의 신사는 다 빨간색을 칠했지만 유독 이곳은 더 빨갛게 보인다. 색과 건축은 류큐양식이란다. 헤이케가 멸망을 하게 되었는데 여덟 살 천황은 꼭 목숨을 잃어야 했을까? 자식은 소유물이 아닌데……

아카마신궁에서 내려보면 단노우라 전투의 장소인 간몬해협이 빤히 보인다. 어린 천황을 기리는 신궁으로는 아주 적절한 장소를 잡았다. 그 신궁입구에는 조각이 하나 있다. 둥그렇고 포근해 보이는 자궁은 바다를 상징한 것 같다. 그 바다위에 젊은 어머니와 어린 아들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역사는 외할머니가 안았다고 되어 있지만 조각가는 어머니로 표현했다. ‘용궁으로 간다.’를 ‘자궁으로 돌아간다.’라고 바꾼 것이다. 어린 아들을 둔 젊은 어머니인 여행자는 여기서 눈물을 짓는다. 그 조각 바로 옆에는 조선통신사의 상륙점임을 보여주는 기념비가 있다. 

아카마신궁에서 내려다보면 단노우라 전투지였던 해협이 보인다.

 아카마신궁의 내부. 용궁을 표현하기 위해서 류규양식을 따랐다고 한다.

 

아카마신궁에는 바다에 몸을 던진 헤이케무사들의 무덤들이 모여 있다. 죽은 어린 천황을 아직도 호위를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무서웠던 ‘호위무사’ 헤이케를 두고 ‘헤이케 이야기’를 지었다. 그 이야기는 별도로 하기로 한다.

 
아카마신궁 앞에는 용궁으로 간 어린 천황을 기리는 조각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입수(入水)라고 표현한다. 어린 아들을 둔 젊은 어머니들은 이 조각을 보고 먹먹해한다. 바다, 어머니, 어린 아들을 잘 표현했다.

 

시모노세키 지역에는 아주 독특한 게를 볼 수 있다. 이 게의 등딱지는 꼭 험상궂고 화난 사무라이의 얼굴 같이 보인다. 이름하여 헤이케게라고 한다. 단노우라 전투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많이 있었는데 바로 헤이케무사들이 바다에 몸을 던진 것이다. 그 이후 이 지역 어부들은 이렇게 생긴 게는 먹지 않고 다시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그 무서웠던 헤이케를 닮은 게를 먹기가 께름칙했나보다. 그런데 이런 일이 근 천 년간 계속되다 보니 이런 게가 이 지역에는 유난히 많게 되었다. 일종의 인위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게는 일본 고유종은 아니고 한국, 중국에도 있지만 이렇게 많지 않다. 마치 긴 상아를 가진 코끼리는 죽음을 맞고 상아가 시원치 않은 코끼리는 살아 남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상아가 없는 코끼리가 많아진 것과 같다. 
 

사람 얼굴의 모양으로 보이는 게. 바다에 몸을 던진 헤이케 무사의 환생이라고 어부들이 믿고 있다. 이 게는 일본 고유종은 아니지만 지난 천년간 어부들이 먹지 않고 방생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는 이런 모습의 게가 아주 많다. 인위적인 선택의 아주 좋은 예.

 

이 헤이케 게는 이후 일본 예술 속에 녹아든다. 우키요에 에는 헤이케 게가 등장하는 그림들이 제법있다. 우타가와 쿠니요시의 ‘다이라 토모토리의 유령’이라는 그림에는 끈질기게 덤비는 헤이케게가 나온다. 일본이 애니메이션 강국인 것은 이런 스토리의 힘과 이를 미술로 시각해 온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우타가와 쿠니요시가 그린 우키요에에 헤이케게가 보인다. 헤이케 사무라이의 영혼이 깃든 게.

 

헤이케 이야기는 일본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군을 따라 죽는 ‘호위무사’, 패배하면 곧 죽음이라는 발상, 이런 일본적인 특성은 야쿠자에 나타난다. 헤이케 사무라이를 동경하던 야쿠자는 헤이케 게를 문신한다. 이런 문화는 이후 야쿠자 밖으로도 번져서 좀 특별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도 이런 문신을 한다.

 
현대에도 좀 특별해보이고 싶은 사람들은 험상궂은 게의 문신을 한다. 헤이케의 환생이다. 아마도 야쿠자문화가 퍼진 것 같다.